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언이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과연 그말은 맞는지 고찰해 봅니다. 이 글은 가톨릭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치프리아누스 - 부산가톨릭대 교수 최원오 신부>>
빼어난 학식·열정으로 교회에 봉사
회심과 순교
치프리아누스(?~258년)는 북아프리카의 비그리스도인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세속 교육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수사학 교수가 되어 명성을 떨치다가, 마흔 살 즈음에 카르타고의 사제 체칠리아누스의 영향으로 성서를 읽게 되면서 마침내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게 되었다(246년). 세례를 받으면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뿐 아니라, 세속 직업마저도 기꺼이 그만 두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치프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249년). 혜성처럼 나타나 신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주교로 우뚝 선 치프리아누스는 박해 가운데서도 빼어난 학식과 열정으로 교회를 섬겼고,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257~258년) 때 몸소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 치프리아누스가 내뱉은 이 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학 논쟁과 오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이 명제가 탄생하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255년경, 마뉴스라는 사람이 치프리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열교나 이단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나중에 가톨릭 교회에 되돌아올 경우 다시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편지였다. 치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답했다. 이단자들이 가톨릭 교회 「바깥」에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라 목욕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 「바깥」에서는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단자들은 가톨릭 교회를 떠나면서 이미 성령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는 가톨릭 교회 「바깥」에서는 세례가 유효하게 베풀어질 수 없다. 교회 「바깥」에는 성령도 없고, 유효한 세례도 없고, 세례의 은총도 없고, 세례의 열매인 구원도 없다. 곧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편지」 73, 21). 그러므로, 교회 「바깥」(이단과 열교)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사실, 치프리아누스의 이 주장은 「구원에 관한 가르침」(구원론)이라기 보다는, 그릇된 성령론에 바탕을 둔 「세례에 관한 가르침」(성사론)의 결론이다. 그런데, 치프리아누스의 이 주장이 마치 구원에 관한 우리 교회의 공식 입장인 듯이 오래도록 되풀이되어 왔다. 만일,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치프리아누스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교회 바깥에는 성령이 없다』라는 그분의 주장도 함께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분』이다. 성령을 가톨릭 교회 울타리나 창백한 교의 속에만 가두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당시 로마의 주교(교황)는 스테파누스 1세였다. 로마 교회는 「전통」만을 내세우면서, 이단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돌아올 경우 다시 세례를 베풀 것이 아니라, 안수만 하여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주교 스테파누스는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서로 파문할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때마침 로마제국을 휩쓴 박해로 말미암아 스테파누스(257년)와 치프리아누스(258년)는 차례로 순교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미처 마무리되지 않았던 이 논쟁은 휴화산처럼 부글거리다가, 그로부터 50여 년 후에 도나투스 열교로 다시금 폭발하여 오래도록 교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교회와 성사에 관한 치프리아누스의 그릇된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죄인들이 베푼 세례는 무효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치프리아누스 스스로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도나투스 열교에게 신학 이론을 제공하여 교회 분열을 도와준 꼴이 되었다.
성사, 하느님의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자들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 세례는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성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베드로가 세례를 베풀어도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것이고, 유다가 세례를 베풀어도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의 공식 입장이다.
사랑이 교회 안에 머물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교회 바깥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 안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참으로 교회 안에 있고 누가 참으로 교회 바깥에 있는지, 누가 참으로 밀이고 누가 참으로 가라지인지, 누가 참으로 양이고 누가 참으로 염소인지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신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세례를 통하여 「지상교회」(보이는 교회)에는 소속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천상교회」(보이지 않는 교회)에도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세례가 아니라, 사랑만이 참으로 우리를 교회 「안」에 있게 한다.
치프리아누스에 따르면, 가톨릭 세례를 받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따르면, 교회의 「안」과 「바깥」을 구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며, 우리가 사랑할 때 참으로 교회 「안」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치프리아누스의 한계와 오류를 훌쩍 뛰어넘었지만, 아직도 우리 교회에서는 치프리아누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릴 때가 많다.
※우리말 번역 : 치프리아누스, 「가톨릭 교회 일치·주님의 기도·도나투스에게」,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7.
참고 : <<<가톨릭교회교리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교회헌장 14항)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헌장 16항)
84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자기의 탓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실 수 있다. (신앙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리서 11.6) 그러나 교회는 복음화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거룩한 권리를 가진다.”(선교교령 7항)
837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된다. 그러나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교회헌장 14항)
838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완전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거나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저 사람들과도 교회는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교회허장 15항)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일치교령 3항) 특히 정교회들과 맺는 이러한 친교는 매우 깊어서 “주님의 성찬을 공동으로 거행할 만한 완전성에 도달하기에 큰 부족함이 없다.”(일치교령 13~18항) 추가 소위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 siam nulla salus)" 라는 배타적 교회 중심주의는 신학의 명제를 잘못 이해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1943년에 발표된 비오12세의 칙서 "신비체 (ency. mystici corporis)" 에서 교황님께서는 비록 보이는 교회의 조직에 한번도 참여한 일이 없더라도 내적으로 간접적 원의 (votum implicitum) 표시로 신비체인 교회에 속하면 구원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1949년 미국 예수회 소속의 신부인 레오나르드 피니 (Leonard Feeney)의 배타적 교회 중심론을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이설로 판정하였습니다. 1949년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입니다.
저도 어려워서 이해 하기가 힘이 듭니다만,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신학 명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성을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의 뜻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즉, 필요성에는 "방법상의 필요성 (necessitas medii) 과 명령상의 필요성 (necessitas praecepti)"으로 구분되고 "방법상의 필요성"에는 "절대적 필요성"과 "상대적 필요성"으로 구분된다고 하는데, 여기에 혼동이 있으면, 이 신학 명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조정제님께서 올려주신 가톨릭 교리서에 잘 설명되어 있는 것 처럼,
1) 사람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은총의 공동체인 내적 교회에 꼭 속할 의무가 있으며, (절대적 필요성) 2)사람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마음 (원욕)으로 교회의 공동체에 속할 의무가 있으며, (상대적 필요성) 3) 사람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보이는 교회의 외적 조직체에 속할 의무 (명령상의 필요성) 가 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