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나무에게

게시판 2004. 11. 18. 19:49

    뿌리가 나무에게…글-이현주
    네가 여린 싹으로 터서 땅 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 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 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 벌과 삶을 희롱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바늘 끝 같은 틈을 찾아야 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 할 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 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 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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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