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마태 16, 15)

오늘 복음은 다가오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 공관복음 모두가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 갈릴래아 주변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이르러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받게 됨을 전하는데, 특히 루가복음은 빵의 기적 후 즉시 장소를 명기하지 않은 채 베드로의 고백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즉, 루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저자 고유의 특성인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까지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예수 추종의 길" -> "종말의 시기에 관한 단절어" ->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순서입니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가 9,18-9,36)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일행과 함께 띠로와 시돈 지방에서 다시 갈릴래아 지방으로 돌아와 호수의 이쪽저쪽에서 활동하시고 난 뒤(마태 15,29-16,12)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당도합니다.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맥의 지하수가 샘솟는 곳을 골라 기원전 2년경 건설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있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은 마치 하나의 필기시험과도 같은 것으로, 제자들이 3년가량 따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2단계로 구성되는데, 예수께서는 우선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물으십니다.(13절)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예언자 등으로 여겼습니다.(14절) 다음으로 질문은 제자들을 향하는데,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하고 대답합니다. 마르코는 단순히 "그리스도"(마르 8,29)로, 루가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루가 9,20)로 소개하면서 즉각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는 예수님의 함구령을 덧붙이고는 이 단락을 끝맺습니다. 물론 마태오도 함구령을 덧붙이지만(20절), 그 사이에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찬사,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첨가하는데, 이는 마태오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이 확실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필기시험을 만점으로 평가하시고는 그를 복된 자로 여기시지만, 이 결과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밝혀 두시며(17절), 이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약속을 합니다. 첫째는 시몬 베드로(돌, 바위)를 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교회창립 약속인데, 이 교회는 죽음의 힘도 능가하는 그런 조직이 될 것입니다.(18절) 둘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셋째는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똑같을 것이라는 매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19절) 이는 실로 엄청난 약속이며, 이 약속이 실현된다면 베드로가 가지는 권능은 절대적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 때문에 학자들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그 밖의 다른 교회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논쟁의 핵심은 예수께서 베드로, 즉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전체에 주시는 권능인지, 아니면 베드로라는 수제자 개인과 그를 계승하는 교황의 인격에 주시는 권능인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실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거짓으로 약속하실 리는 없을 것이므로 어느 쪽에든 그 권능이 주어져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아마 교회 전체에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나 전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주교단에 의해 일치됨으로 이들의 권한과 책임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엄청난 권능을 교회나 교황이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와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권능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계획에 달려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매여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말씀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에서 즉각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머지않은 수난과 죽음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쉽게 수용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방금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듣고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그는 예수를 붙들고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립니다.(22절) 이것으로 베드로 고백의 가치가 드러난 셈입니다.

누구나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시어 다시 오시리라"고 겉으로는 화려하고 정확한 고백을 하지만 속으로는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못하는 형편없는 고백을 하지 않나 되돌아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태도는 예수께 장애물로 간주됩니다.(23절)

'아르스의 성자'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우리의 집은 천국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호텔에 투숙한 여행객과도 같으며 길을 떠나자마자 항상 천상의 집을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한 가지 증거는 우리의 정의와 공평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과 고통이 없으며 정의가 다스리고 모든 것이 공평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평과 정의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에는 천국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도 나침반의 바늘을 보고 뱃머리를 결정할 수 있듯이, 마음속에 간직한 나침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합니다. 그 나침반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집을 향해 가고 있음을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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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래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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